우연히 단구대라는 소리를 듣고
어디에 무엇인가 궁금증에 찾아 보았습니다~~~
차를 가지고
정순왕후 생가방향에서 찾아 보는것이
편합니다
정순왕후생가 입구의 오청취당 시비
정순왕후 생가 입구의 효자문
정순왕후 생가 입구에 충신문
정순왕후 생가
김기현 가옥
단구대에서 호젓한 산행으로 정순왕후 생가에 갈수 있음
도로에 뭍혀버린 단구대
긑부분만 남아있다
단구대는 한림학사 용계(龍溪) 金止男(김지남: 단구자 김적선생의 從妹夫)이 자주
산책하는 곳으로 봄에는 주변 일대가 복숭아꽃으로 뒤덮였다고 한다.
대교천(개심사쪽 신창저수지와 음암의 성암저수지 물이 만나 A지구로 흘러간다)
건너편에 가야산이 보인다
단구대에는 김홍욱의 아버지 김적이 머물렀던 흔적이 남아 있다.
김적은 광해군 시절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 한다리마을로 돌아와 거주하였는데,
마음을 달래고자 용유천에 배를 띄워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이때 용유천
아래에 맑은 못이 있어 그 안의 괴암이 모두 보이는 자리에 대(臺)를 쌓았다.
그리고 이곳을 ‘밤낮으로 밝고 신선이 산다.’는 의미로 ‘단구대(丹丘臺)’라
이름 지은 후 자신의 호도 단구자(丹丘子)라 하였다.
그의 아들 김홍욱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이곳에 와서 부친을 모시고 효성을 다하였다 전한다.
바위에 '丹丘遺墟'란 글자가 쓰여 있는데 마모되기 시작한다
끝부
丹丘遺墟(단구유허)
丹丘: 신선이 산다는 곳(밤낮이 늘 밝다고 함)
遺墟: 오랜 세월에 쓸쓸하게 남아 있는 역사 어린 곳
연꽃이 피기 시작 한다
이곳은 물이 깊어 명주실꾸리 세 개를 늘여야 바닥이 닿을 정도라고 한다.
용유대는 이 깊은 물가 한쪽의 갈라진 바위를 말한다.
이 바위를 용유대라고 한 것은 깊은 물속의 용이 놀던 곳이란 뜻에서이다.
한편, 옛날 서산 고을에 원님이 부임해 오면 관아의 물이 좋지 않다고 타박하였다.
그리하여 종종 용유대의 물을 길어오라고 명을 하면 관인들이 멀리 있는
용유대까지 가기 힘들어 관아 근처의 유계리 ‘개쳉이샘’에서 물을 길어갔다.
그리고는 용유대 물을 가져왔다고 원님에게 고하였다.
용유대(龍遊臺)는 단구자 김적선생이 노닐던 곳으로 바위가 크고 둥글둥글하다
대교천과 덕지천의 합수 지점에서 북으로 150m 정도 올라가면 ‘용유대(龍遊臺)’라
불리는 바위 군락이 있다. 높이 2~5m에 이르는 둥근 달걀 모양의 바위 6~7개와
십 수 그루의 소나무가 만들어내는 풍광은 매우 특이한데,
용이 와서 놀던 곳이라는 뜻으로 지은 ‘용유대’란 명칭에서도
그 신비감을 짐작할 수 있다. 용유대의 서쪽 천변에 있는 큰 바위의 평평한 면에는
‘단구김선생유상고허(丹丘金先生遊賞古墟)’라는 9자가 세로로 새겨져 있고,
상단부에는 김적이 벼루로 이용했다고 하는 네모진 구멍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건너편의 소나무숲과 쉼터